십년 넘게 쌓인 분량을 하루만에 디깅 가능할 정도로 작은 시장인 보컬로이드 힙합. 그러나 특이점이 와버린 2024년에는 디깅할 거리가 초당 하나씩 늘어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음악 AI 사이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Suno AI에서 디깅을 시작했지만 문제가 여럿 있었다. 일단 Suno가 노래 만드는 데는 좋으나 디깅하는 데에는 그리 좋은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게 제일 컸고, 이 AI시장에서 마저도 보컬로이드 힙합은 비주류라는 것도 크리티컬한 문제 중 하나였다.
나한테 남은 선택지는 직접 원하는 노래를 뽑아내는 것. 그러나 매일 무료로 주는 50크레딧으로는 좋은 노래를 뽑아내기 어려웠다. 미쿠가 랩을 하는 노래 자체가 너무 적어서 AI도 학습을 못했는지, 다른 장르에 비해서 뽑아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 같기도 했다. 결국 50크레딧은 괜찮은 노래를 하나도 뽑아내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그럼 결제해야지 뭐
그렇게 나에게 2500크레딧이 주어졌고, 나는 명령어를 이용해 몇가지 실험을 해봤다. 일단 miku voice, vocaloid 등의 명령어를 써도 무조건 미쿠 목소리를 뽑아내는 것이 아니었고, 벌스1이 미쿠 목소리와 비슷하게 뽑혔다고 해도 벌스2에서 남자 목소리가 나오는 등, Style of music에 적는 명령어 만으로는 완벽하게 제어가 불가능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붐뱁 비트에 미쿠 목소리를 넣으려고 하면 높은 확률로 남자 목소리가 나오는 결과를 보였기 때문에 붐뱁 비트는 실험 극초반부터 포기하게 됐다.
대신 [Verse1 - Miku Rap]과 같은 방식으로 가사에 명령어를 넣어서 제어하는 방법이 있긴 했다. 근데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이런 방식을 쓰면 노래 전체의 퀄리티가 낮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결국 취향에 맞는 노래를 뽑아내는 방법은 크레딧빨로 여러번 뽑아보는 것이 정답인 듯 했다.
그리하여 크레딧을 전부 쓰고 뽑아낸 몇개의 결과물
1. 무중력상태
구글 번역기로 쓴 가사와 여러 보카로곡에서 참고한 가사를 짜깁기한 가사로 만든 미쿠의 3개국어 랩. 사실 곡 자체는 더 맘에 드는 게 있었지만 그래도 같은 가사로 뽑은 곡 중에는 이 곡이 가장 미쿠에 가깝게 뽑혔다는 느낌.
2. 미쿠미쿠하게해줄게 랩버전
미쿠미쿠하게해줄게 가사를 그대로 복붙한 뒤에 rap 명령어를 넣어서 랩을 하게 만들어보려고 했던 노래. 결과적으론 미쿠도 아니고 랩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느낌이 됐지만, 확실히 일본어로만 가사를 넣어서 그런지 더 보컬로이드스럽게 느껴지긴 했다.
3. 말해줘
제목만 넣고 Generate Lyric 기능을 써서 만들어 본 노래. 특이하게 kagamine len voice라는 명령어를 넣어봤는데 더 미쿠에 가깝게 뽑아준 이상현상을 보였다.
4. 와이셔츠를 다렸지
양홍원과 릴러말즈의 와이셔츠를 다렸지 가사를 복붙한 노래. 역시 플로우 해석이 어려웠는지 벌스1에서는 시키지도 않은 가사 반복을 하고 벌스2에서는 억지로 훅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AI 너, 아직 그정도 아니야.
5. Untitled
한국어로만 쓴 가사를 부르게 하고 싶어서 직접 가사 써서 넣은 노래. 아무래도 직접 가사를 쓰면 원하는 플로우를 생각하면서 듣다보니 기준이 엄격해지는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여기서 가장 많은 크레딧을 썼다. 그래도 벌스2에서 나비가 돼/비가 맺/이번 밤엔 이 부분 만큼은 내가 원했던 플로우로 불러서 너무 신기했다.역시 크레딧을 쓰다보면 언젠간 하나 해주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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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AI음악 역시 AI그림처럼 일정 퀄리티 이상의 결과물을 뽑아내는 데는 탁월한 효과를 보여주지만, 취향을 저격하는 특정 결과물을 뽑아내기엔 아직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나 자신의 취향을 잘 모르는 게 아닐까하는 조금 철학적인 생각도 들었다.
2500 크레딧이면 총 500개의 결과물을 뽑아본건데, 이 AI생성 과정이 디깅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진행될수록 원하던 결과값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는, 그 점 까지도 정말 디깅과 비슷했다. 만약 디깅 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다.
근데 두번은 안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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